이번 한 주간은 힘든 영적 싸움이었습니다. 아직 그 싸움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 주시는 능력으로 승리했습니다. 또한 진행되는 영적 싸움도 승리할 것입니다. 이미 이 싸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해 놓은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환난이나 어려움이 와도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고 오직 기도와 말씀묵상으로 싸웠습니다. 환경이나 사람들이 힘들게 하여도 그것이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거기서 힘을 소진 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환경이나 사람들은 사실 허상들입니다. 실체는 바로 어두운 영들이며 실상은 바로 난 자신과 영적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싸움 중에도 목사는 오직 한가지만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에 제게 주신 비전입니다. 그 비전으로 인하여 힘들 때에도 넉넉할 수 있었습니다. 비전이 제 마음에 살아 있는 한 영적싸움은 그리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비전이 내 눈에 보이는 한 영적 싸움은 하나의 과정으로 보였습니다. 문제는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이나 환경이 나의 삶을 가로 막는 큰 산으로 보일 때 비전은 일시적으로 사라지는 듯합니다. 이럴 때에는 평상시에 별로 크게 보이지 않던 그 산이 산떼미처럼 크게 보입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산이 되어 한숨을 짓고 그 때부터 눈은 환경과 사람에 고정되게 됩니다.
목사도 잠시 이런 현상을 겪었습니다. 보여 지는 사람과 환경이 내 감정이 나를 사로잡을 때 잠시 이런 현상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런 큰 산이 나를 가로 막고 있을 때, 목사는 눈을 감았습니다. 눈을 감는 이유는 환경이라는 산에 눈이 고정되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이유는 주님과 깊은 영적 교제을 위함입니다. 새벽마다 눈을 감고 기도하는 주님과의 교제의 시간은 이 모든 것들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면 잠시 산으로 인하여 가리워졌던 비전이 너무나 확실하게 보여집니다. 주님과 교제가 회복되면 산 너머에 있는 비전은 보이기 시작합니다. 너무나 신기할 정도입니다. 잠시 비전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바로 제 영안이 어두워져 산으로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도 너무나 선명한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항상 비전이 선포되고 비전을 향하여 모두가 집중하면 악한 영들도 집중합니다. 평상시에는 별로 활동이 없던 악한 영들도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비전의 초점을 잃어 버리게 하려고 환경이라는 큰 산을 교회와 성도들에게 만들어 줍니다. 평상시에는 별 것 아닌 환경의 어려움이 이럴 때는 마음에 얼마나 큰 산으로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비전에 집중하면 다른 때와 달리 현실에서 실천해야 하는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한 부담이 곧바로 바로 넘을 수 없는 산으로 다가 옵니다.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고, 화가 치밀어 오르고 불평이 터집니다. 그리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강팍해집니다. 그리고 외치던 비전은 마음에서 실종됩니다.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을 넘어야 합니다. 산 너머에 바로 비전 성취가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을 때는 그 산을 육신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 때는 영의 눈을 뜨고 산 너머에 있는 비전을 영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마음으로 확실하게 보아야 합니다. 악한 영들이 우리의 비전을 산으로 가리웠을 때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순종으로 그것을 이겼습니다. 자기 눈과 생각을 신뢰하지 않고 오직 주께서 말씀하는 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비전의 사람은 잠간의 어둠이나 환경이 주는 고난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처럼 외쳐야 합니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자신이 새벽을 깨운다는 것은 고난으로 인하여 보이지 않는 비전을 다시 보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은 비전을 다시 볼 때입니다. 이목사
이런 싸움 중에도 목사는 오직 한가지만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에 제게 주신 비전입니다. 그 비전으로 인하여 힘들 때에도 넉넉할 수 있었습니다. 비전이 제 마음에 살아 있는 한 영적싸움은 그리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비전이 내 눈에 보이는 한 영적 싸움은 하나의 과정으로 보였습니다. 문제는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이나 환경이 나의 삶을 가로 막는 큰 산으로 보일 때 비전은 일시적으로 사라지는 듯합니다. 이럴 때에는 평상시에 별로 크게 보이지 않던 그 산이 산떼미처럼 크게 보입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산이 되어 한숨을 짓고 그 때부터 눈은 환경과 사람에 고정되게 됩니다.
목사도 잠시 이런 현상을 겪었습니다. 보여 지는 사람과 환경이 내 감정이 나를 사로잡을 때 잠시 이런 현상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런 큰 산이 나를 가로 막고 있을 때, 목사는 눈을 감았습니다. 눈을 감는 이유는 환경이라는 산에 눈이 고정되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이유는 주님과 깊은 영적 교제을 위함입니다. 새벽마다 눈을 감고 기도하는 주님과의 교제의 시간은 이 모든 것들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면 잠시 산으로 인하여 가리워졌던 비전이 너무나 확실하게 보여집니다. 주님과 교제가 회복되면 산 너머에 있는 비전은 보이기 시작합니다. 너무나 신기할 정도입니다. 잠시 비전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바로 제 영안이 어두워져 산으로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도 너무나 선명한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항상 비전이 선포되고 비전을 향하여 모두가 집중하면 악한 영들도 집중합니다. 평상시에는 별로 활동이 없던 악한 영들도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비전의 초점을 잃어 버리게 하려고 환경이라는 큰 산을 교회와 성도들에게 만들어 줍니다. 평상시에는 별 것 아닌 환경의 어려움이 이럴 때는 마음에 얼마나 큰 산으로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비전에 집중하면 다른 때와 달리 현실에서 실천해야 하는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한 부담이 곧바로 바로 넘을 수 없는 산으로 다가 옵니다.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고, 화가 치밀어 오르고 불평이 터집니다. 그리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강팍해집니다. 그리고 외치던 비전은 마음에서 실종됩니다.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을 넘어야 합니다. 산 너머에 바로 비전 성취가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을 때는 그 산을 육신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 때는 영의 눈을 뜨고 산 너머에 있는 비전을 영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마음으로 확실하게 보아야 합니다. 악한 영들이 우리의 비전을 산으로 가리웠을 때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순종으로 그것을 이겼습니다. 자기 눈과 생각을 신뢰하지 않고 오직 주께서 말씀하는 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비전의 사람은 잠간의 어둠이나 환경이 주는 고난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처럼 외쳐야 합니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자신이 새벽을 깨운다는 것은 고난으로 인하여 보이지 않는 비전을 다시 보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은 비전을 다시 볼 때입니다. 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