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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2] 스위스 용병의 충성

이몽식 2012.09.02 03:30 조회 수 : 5412

지금도 로마 교황청은 이탈리아인이 아닌 스위스 용병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역사적 유래가 깊습니다. 중세 스위스는 조그만 땅에 척박한 농경지를 가진 힘없는 농업국가였습니다. 이런 스위스가 유럽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339년에 스위스 용병들이 최강의 전력이었던 합스부르크 군대를 격파하면서 부터입니다. 이들이 용병으로 나가게 된 것은 당시 유럽이 해만 뜨면 전쟁을 치루며 각축전을 벌이던 때에 이웃 강대국들의 필요에 의해 서입니다. 이들에게 용병이라는 직업이 매력이 있었던 것은 밭을 갈며 잘 살지 못한 이들에게 용병이라는 직업은 높은 임금을 받고 전쟁에 승리했을 경우에는 인센티브를 받는 고임금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용병으로 나가서 목숨 걸고 싸웠던 이유는 고용주와의 믿음이 한 번 깨지면 더 이상 용병으로 돈을 벌 수 없다는 불안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고용주와의 신뢰를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게 만들었고 그런 이유가 전쟁에 나가면 절대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 스위스 용병의 명성이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스위스 용병이 결정적 신뢰를 받게 된 것은 1527년 5월 6일 교황 클레멘트 7세가 기거하던 교황청이 신성 로마제국 군에게 공격을 받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을 때입니다. 2만이 넘는 신성 로마제국의 혼성군이 로마 성벽을 넘어 교황청으로 쳐들어오자 교황청 외곽을 담당하던 수비대 병력이 돌파 당하자 약탈에 눈이 먼 신성 로마 제국군과 교황청 사이에 189명의 스위스 근위병만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무기를 버리고 줄행랑을 쳐야 했던 상황에서 그들은 그들의 고용주를 위해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으로 통하는 길목을 틀어쥐고 189명이 2만 병력을 막아내며 시간을 버는 동안 클레멘트 7세는 간신히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했고 스위스 근위대는 그 자리에서 147명이나 사망하는 치명적 손실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댓가로 전 유럽인들과 교황의 신임을 얻게 됩니다.

 

비록 이 사건으로 거의 전멸을 당했지만 고용주를 위해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던 그들의 철저한 계약정신은 스위스 용병에 대한 평가를 극적으로 높여 주었습니다. 고용주를 버리고 도망쳤을 경우 후손들이 다시는 용병사업을 할 수 없다는 막중한 책임감과 최강 스위스 근위대라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이들은 자랑스러운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이 사건 이후 스위스 용병은 근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교황청 근위대는 이탈리아인이 아닌 100% 스위스 용병으로만 운영되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선조들이 흘린 눈물과 피로 인하여 그들의 후손들은 높은 자부심과 복지를 선물로 받았으며 오늘날에 부강한 스위스를 있게 만들었습니다.

 

스위스 용병들이 고용주와 계약을 생명으로 지키는 모습은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충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고 우리를 부르시어 주인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로 일꾼 삼아주셨습니다. 그 일꾼으로 부름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은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 우리가 이 세상사는 동안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것은 충성입니다. 그래서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자리를 지킵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때때로 희생이 요구되는데 그 대가를 기껏이 지불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이렇게 충성을 다한 일꾼들에게는 하나님이 상을 주십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이번 항존직 피택에 충성된 일꾼들이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