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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향한 코꿰기 사연들 3. ~ 이건 뭐지 ~ 개콘..

토마스 2012.07.07 17:40 조회 수 : 25895

이제 3번째 코꿰기 사연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음 ~

 

세번째 순서였는데..

 

3.  청순 가련 OOO 형제의 순애보 선생님과의 코꿰기..

    내용이 넘 ~ 길어 추후에 별도로 스페셜 코너를 만들겠슴다. 

 

~ 스페셜 코너입니다.

 

내용이 거의 '대 서사시' 분량이라 ~ 일단 1차 요약한 후 하단부에 전문을 공개합니다.

 

실명대신 청순 가련 OOO형제로 전격 표기합니다.

 

읽다가 ~ 개콘의 ' 무섭지 아니한 가'의 대사처럼 ~ 이건 뭐지 ~ 라는 느낌이 드실 것 같아

미리 마음의 준비 하시기 바랍니다. - 과연 끝까지 다 읽으실 수 있으실른지..

 

판단은 ~ 여러분의 몫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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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짝사랑이자 첫사랑에 대한 추억

글쓴이 : S. (그냥 ‘이름(名)’일수도 있고 ‘성(姓)’일수도 있는 흔한 이름이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라는 말이 있다. 근데 다른 것들은 다 잊었고 잊어버렸는데 잊혀지지 않는 일,

아니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학창시절, 그것도 중학교 2학년 때의 일, 그러니까 내가 15살(1995년) 때의 일이다.

그날도 행사처럼 교생 선생님이 오신 날이다. 여자 선생님이라고 아이들은 좋아라 했지만

난 중학교 1학년 때도(14살/1994년) 교생 선생님이 오셨다가 그냥 스치듯이 지나간 날이 있어서

아무렇지 않았다. ---또 스치듯 지나가겠지……?, 어디까지나 선생님이 되려는 그저 그런 예행연습……,

실습하러 나온 거니까…….--- 그 어느 곳에서나 처음은 자기소개를 간단히 하듯 교생 선생님도

자신의 소개를 하셨지만 난 그런 와중에도 그 말들을 흘려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겉으로 표현은 안했지만 예전 중학교 1학년 때의 경험(?)이 있어서였는지 별 생각을 안했다.

그저 그런 한주가 지나가고 있을 무렵 나에게 생긴 일들 가운데 내가 속해있던 반 아이들도,

다른 반 아이들까지 그 전까지는, 다른 때는 놀라지 않던 아이들이 (소문이 돌면서)다 놀라고

나도 놀란 일이 벌어졌다. 바로 점심시간이다.

 

~ 중간 생략..

 

그러는 가운데 또 하나의 사건은 상담시간…….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내가 또 하나의 사건으로 잡기에

이렇게 잡은 것이지만 상담시간도 아니었다. 식사하면서 나눈 이야기들이었고

거기서 반복하고, 살(번외)을 덧붙이기만 했다. 식사하면서 나눈 이야기들은 앞전에도 적었지만

질문하신 것으로 보면 내가 해야 했던 답변은 말이 긴 답변이 가야 정상인데 단답형으로 잘라 말했던 나여서

그 시간이 반복된 것이었다. 예전 1학년 때 오셨던 교생 선생님 때는 식사시간도 일반 선생님과 다르지 않았고

상담시간은 귀차니즘이 있으셨는지 그 귀차니즘이 빛을 발했다(?). 바로 A4한 장이였었나?

그 당시 (세로면이 긴)시험지만한 종이에 질문이 적혀 있고 그 질문의 답을 채워가는 필기 형식이었다.

그런데 2학년 때 만난 교생선생님과는 시간이 간다는 게 무색할 정도(?)이고 상상도 못할 기쁨…….

행복이었다. (4교시가 끝나고 가진)점심시간이 끝나기 몇 분전에 가진 시간이었고

그 날은 6교시까지 있는 시간에다 나도 함께 교실 청소를 해야 할 날이었다.

집안일에서부터 미래의 비전까지……. 내가 속해 있는 반 담임 선생님도 전혀 모르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듣기도 하며 대화가 오고 갔다. 이 앞전에서도 적었지만 1학년 때의 교생선생님과는 차원이 다르게 밝고

친절한 면이 빛을 발하셨다. 나에 대해 학교 아이들이 아닌 교회 아이들에게 나에 대해

깊이 말은 한 적도 없었지만 가끔씩 부서별로 모여 자신의 삶에 대해 나누는 시간이 되어 나누면

돌아오는 (웃으면서 하는)대답(형제들)이나 (말로 아닌)표현(자매)들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근데?”, “빨리 끝내지?” 하는 등의 시큰둥한(한쪽 귀로 듣고 있어도 한쪽귀로 흘리는) 표현들뿐이었고

나에 대한 말은 못이 박히게 들었다고 자기 교만함이 가득한 아이(형제)는 나에게 “왜? 지금 이 교회 모임에서

너가 교회에서 지내거나 놀았던 것들을 이야기하냐?”고 웃으면서 말한 아이도 있었다.

오락실이 있었지만 그 곳보다는 교회에서 많이 지내거나 놀았고 학교-집-교회라는

일종의 삼각형 형태 같은 곳 이외의 것(곳)을 모르고 지냈던 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여자 친구가 없었던 나에게 교회는 놀이터이자 기도처였고 안식처였다.

저녁이 되어 어두움이 내릴 때면 그 어두움을 놀이삼아 놀았고 아침이 밝아오면

그 밝음을 놀이삼아 놀던 놀이터였고, 그 당시 지금보다 더한 비교 의식과 거기에서 오는 열등감에

사람보다 주님께 터트렸던……. 감사보다 불만을 토했던 기도처였고,

그러면서도 성경책을 보며 지금은(그 당시는) 없지만 이 후에는 나도 생길 거라는

미래의 꿈, 희망을 가지며 있었던 안식처였다. 이외에도 모든 말, 일들을 교생 선생님과 나누었다.

“넌 꼭 그렇게 될 꺼야, 너가 가진 꿈들도 이루게 될 것이고, 너가 바라는 그 여자 친구도

사귀게 될 거야…….”교생 선생님이 내게 한 말이었다. 오고가는 대화 속에 세상을 다 가진듯한 느낌,

먼 미래일이지만 왠지 바로 지금 다 이루어진 듯 한 느낌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중간 생략

 

사람이란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그 일을 겪으니까

뭔가 아쉽고 무겁게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아마도 나의 유치원 생활부터 대학시절을 통틀어서 봐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느낀 감정이었다. 그 선생님이 가신 이후로 다른 때는 그 어떤 선생님에게

쓰지 않은 편지를 적기 시작했다. 다른 때는 의무감으로 쓴 편지(국군의 날 위문편지, 스승의 날

선생님께 쓰는 편지……. 등등)들을 많이 썼지만 그때 쓰는 편지는 자발적으로 쓰는 편지였고

의무감으로 쓴 때보다는 지금 생각해보면 뭔 말을 그리도 많이 적었는지 의무적으로 쓴 편지와는

질적(?), 양적으로 달랐다. 3분의 1일을 넘어 2~5장, 수업이 끝나 쉬는 시간, 등하교 길 가운데,

심지어 교회(예배 시간이 아닌 부서 모임 중)에서도…….

그런데 내가 써 보낸 편지와 편지지는 일반적인 흰 바탕의 줄이 있는 것이고 가장 기본적인 것인데도

답장으로 온(선생님이 쓰신 편지는) 알록달록한 것이나 그 당시 유행했던 만화 캐릭터 편지지였다.

뭐, 편지지야 무엇이든 간에 답장을 받는다는 것. 누군가도 나에게 편지를 썼다는 것에 대해 또 한 번 놀랐고

행복했다. 지금 그 답장을 받은 편지는 없지만 ‘추억’이란 이름으로 내 마음에 남아있고,

주고받은 편지에 대한 내용도 지금은 모르지만 ‘행복’이란 내용으로 내 마음에 남아있다.

 

지금 여기에 적은 일들은 수 많은 일들 중 고르고 골라서 적은 일들이다.

누군가는 나의 이 글을 보고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선생님이 잘해줬으니까

아직까지도 생각나는 것 아니겠느냐고, 이 글을 쓴 필자 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해줬을 텐데

오해하는 것 아니냐고- 난 대답한다(이게 진정 독자에 질문에 대답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앞에도 적었지만 사람은 누구나 한계가 있다. ‘도브 컴플렉스’를 아는가? 내가 하는 이 생각,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마음, 이 감정이 오해라면 이런 오해를 하기 훨씬 전에 포기하시 듯 나를 버리셔야 했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하셨다면 교생 실습이 끝나기까지 점심을 함께 한 일과

그 이외의 대화의 시간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나는 되묻고 싶다. 누군가를 위하는 척, 생각해 주는 척,

함께 있어 주는 척 가면을 쓰듯 변장하기는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 가면(변장) 또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벗어지게 되고 벗어야 한다.

자신의 변장하는 힘의 한계 때문에 지치기 때문이다. 힘의 한계가 오면 그 가면을 벗고

원래의 자신으로 되돌아가거나, 타인이 그것(가면(변장)을 착탈(着脫)하는 구나라고)을 눈치 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시인 유치환의 ‘행복’ 중에서-

 

※도브 컴플렉스 (Dover Complex) : 수컷에게 지나치게 헌신적인 암컷 비둘기가

자신의 사랑에 힘겨워 일찍 죽는다는 데서 비롯됐다.

 

~~~~~~~~~~~~~~~~~~~~~~~~~~~~~~~~~~~~~~~~~~~~~~~~~~~~~~~~~~~~~~~~~~~~~~~~~~~~~~~~~~~~~~~~~~

 

전문입니다.

 

내 짝사랑이자 첫사랑에 대한 추억

글쓴이 : S. (그냥 ‘이름(名)’일수도 있고 ‘성(姓)’일수도 있는 흔한 이름이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라는 말이 있다. 근데 다른 것들은 다 잊었고 잊어버렸는데 잊혀지지 않는 일,

아니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학창시절, 그것도 중학교 2학년 때의 일, 그러니까 내가 15살(1995년) 때의 일이다.

그날도 행사처럼 교생 선생님이 오신 날이다. 여자 선생님이라고 아이들은 좋아라 했지만

난 중학교 1학년 때도(14살/1994년) 교생 선생님이 오셨다가 그냥 스치듯이 지나간 날이 있어서

아무렇지 않았다. ---또 스치듯 지나가겠지……?, 어디까지나 선생님이 되려는 그저 그런 예행연습……,

실습하러 나온 거니까…….--- 그 어느 곳에서나 처음은 자기소개를 간단히 하듯

교생 선생님도 자신의 소개를 하셨지만 난 그런 와중에도 그 말들을 흘려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겉으로 표현은 안했지만 예전 중학교 1학년 때의 경험(?)이 있어서였는지 별 생각을 안했다.

 

그저 그런 한주가 지나가고 있을 무렵 나에게 생긴 일들 가운데 내가 속해있던 반 아이들도,

다른 반 아이들까지 그 전까지는, 다른 때는 놀라지 않던 아이들이 (소문이 돌면서)다 놀라고

나도 놀란 일이 벌어졌다. 바로 점심시간이다. 이전까지 나와 우리 학교 아이들이 봐온 점심시간의 선생님들은

어쩌다가 도시락을 싸서 온 날은 교무실이나 대부분 학교 식당(지금은 안 들어가 봐서 모르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하더라도 교직원 식당(학생 식당과 벽돌로 칸막이가 있었다. 그래서 출입구도 달랐다.

왜 만들었는지 모를 칸막이 옆 모서리에 작은 문이 달려 있었다.)에서 식사하거나 외출하시는 것이 대부분인데

2일째인가 3일째부터 내 옆이나 내 앞에서 같이, 그것도 대화를 하면서 식사를 하시는 것이었다.

 

그 전부터 점심시간이 몇 십분 안 지났는데 라운딩을 하는 모습은 봤다.

그냥 학교 위치도를 익히려나 보다 했었다. 아무도, 그 누구도 같이 먹거나 끼워 주지도 않으려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그것은 일대 사건 아닌 일대 사건이였다.

 

그러나 난 몇 일이나 몇 주하다 말겠지 싶었고 식사하시면서도 물어보시는 말씀에도

진심이 아닌 학생으로서의 의례상 멘트(일종의 방송 멘트)로만 답했다

(그것도 단답형으로 5~10마디 넘지 않는 단어형).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생각이 나서 한숨과 눈물이 난다. 글씨가 바다의 파도처럼 일렁인다는게

이렇게 보이는 것일까?~ 내가 도시락을 싸오지 못해서 매점(라면)이나 식당을 갈 때도

교생 선생님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오셨어도 같이 가셔서 밥과 반찬을 주시고 식당을 갈 때도 같이 가셨다.

 

분명히 선생님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오셨는데도 학생 식당이 아닌 교직원 식당으로 불러서 같이 식사를 했다.

도시락을 안 싸가지고 와서 식당을 이용할 때도 난 학생 식당이 아닌 교직원 식당으로 가게 됐다.

몇 일이나 몇 주 하다가 말겠지 했던 내 생각이 깨어질 무렵 아이들에게도 선생님과 나와의 식사 및

식사중의 대화도 일상이 되어갔다. 하지만 그러는 아이들 중에는 부러워하는(?) 아이들도 몇 몇은 있었고

그래서인지 선생님 모르게 선생님께 야한 장난(??)을 치는 아이들도 있었다(내가 다닌 학교는

남녀 공학이 아니고 남 학교였다). 사람이란 누구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내가 도시락을 싸온다고 해도 모 유행가 가사처럼 부잣집 아들 녀석(~이라면) 반찬이 그게 뭐냐며

나에게 화를 내며 뭐라고 할 정도의 반찬과 한두 번이 아닌 다분히 학생으로서의(?) 의례적 답변,

그것도 단답형의 멘트들……. 교생실습을 나오시기 전까지 나에게 있었던 일들은 모르시는데도

내게 대한 행동은 다 알고 계신 듯 한 행동들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니 일반적인 선생님이라면

“나한테 왜 그래?”, “나한테 뭐 불만이라도 있어?”, “나하고 말하기 싫어?”,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야…….

지금은 내가 나온 것이지 그때 그 선생님이 다시 나온 게 아니잖아?” 이렇게 나오셨을 텐데

그런 말이나 행동이 전혀 없이 늘 밝고 친절했다.

 

그러는 가운데 또 하나의 사건은 상담시간…….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내가 또 하나의 사건으로 잡기에

이렇게 잡은 것이지만 상담시간도 아니었다. 식사하면서 나눈 이야기들이었고 거기서 반복하고,

살(번외)을 덧붙이기만 했다. 식사하면서 나눈 이야기들은 앞전에도 적었지만 질문하신 것으로 보면

내가 해야 했던 답변은 말이 긴 답변이 가야 정상인데 단답형으로 잘라 말했던 나여서

그 시간이 반복된 것이었다. 예전 1학년 때 오셨던 교생 선생님 때는 식사시간도 일반 선생님과 다르지 않았고

상담시간은 귀차니즘이 있으셨는지 그 귀차니즘이 빛을 발했다(?). 바로 A4한 장이였었나?

그 당시 (세로면이 긴)시험지만한 종이에 질문이 적혀 있고 그 질문의 답을 채워가는 필기 형식이었다.

그런데 2학년 때 만난 교생선생님과는 시간이 간다는 게 무색할 정도(?)이고 상상도 못할 기쁨…….

행복이었다. (4교시가 끝나고 가진)점심시간이 끝나기 몇 분전에 가진 시간이었고

그 날은 6교시까지 있는 시간에다 나도 함께 교실 청소를 해야 할 날이었다.

 

집안일에서부터 미래의 비전까지……. 내가 속해 있는 반 담임 선생님도 전혀 모르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듣기도 하며 대화가 오고 갔다. 이 앞전에서도 적었지만 1학년 때의 교생선생님과는 차원이 다르게

밝고 친절한 면이 빛을 발하셨다. 나에 대해 학교 아이들이 아닌 교회 아이들에게 나에 대해

깊이 말은 한 적도 없었지만 가끔씩 부서별로 모여 자신의 삶에 대해 나누는 시간이 되어 나누면

돌아오는 (웃으면서 하는)대답(형제들)이나 (말로 아닌)표현(자매)들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근데?”, “빨리 끝내지?” 하는 등의 시큰둥한(한쪽 귀로 듣고 있어도 한쪽귀로 흘리는) 표현들뿐이었고

나에 대한 말은 못이 박히게 들었다고 자기 교만함이 가득한 아이(형제)는 나에게

“왜? 지금 이 교회 모임에서 너가 교회에서 지내거나 놀았던 것들을 이야기하냐?”고

웃으면서 말한 아이도 있었다. 오락실이 있었지만 그 곳보다는 교회에서 많이 지내거나 놀았고

학교-집-교회라는 일종의 삼각형 형태 같은 곳 이외의 것(곳)을 모르고 지냈던 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여자 친구가 없었던 나에게 교회는 놀이터이자 기도처였고 안식처였다.

저녁이 되어 어두움이 내릴 때면 그 어두움을 놀이삼아 놀았고 아침이 밝아오면 그 밝음을 놀이삼아

놀던 놀이터였고, 그 당시 지금보다 더한 비교 의식과 거기에서 오는 열등감에 사람보다 주님께 터트렸던…….

감사보다 불만을 토했던 기도처였고, 그러면서도 성경책을 보며 지금은(그 당시는) 없지만

이 후에는 나도 생길 거라는 미래의 꿈, 희망을 가지며 있었던 안식처였다.

 

이외에도 모든 말, 일들을 교생 선생님과 나누었다. “넌 꼭 그렇게 될 꺼야, 너가 가진 꿈들도 이루게 될 것이고,

너가 바라는 그 여자 친구도 사귀게 될 거야…….”교생 선생님이 내게 한 말이었다.

오고가는 대화 속에 세상을 다 가진듯한 느낌, 먼 미래일이지만

왠지 바로 지금 다 이루어진 듯 한 느낌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전까지 내가 들었던 말들…….답변들은 “너가?”, “어느 세월에?”, “너 꼴을 봐?”,

“너 같이 무식하고 고지식하게 교회만 알고 하는 아이, 여자 애들은 너 같은 애 좋아하지 않아.”,

“너 말고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쌔고 쌨어.”, “꿈 깨라”(비슷한 말로 “냉수 마시고 속 차려”),

 

“꿈만 가져(꿈 만 꿔)”, “그래! 꼭 이뤄질 거야 하지만 너하고 그 일을 함께하는 여자는

세상(세상천지)에 없을 거야.” 등의 답변이었다. 그 부정적인 말들을 들으며 지내다가

교생 선생님의 그 말은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반신반의하며 ‘혹시 지금 날 다른 말로 놀리시는건가?’ 하는

부적적인 생각도 약간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도 진짜 잠시였다.

그 전까지 나를 대하시면서 했던 말들과 행동들, 그리고 그 상담 시간에도 보여 주셨던 행동들과 말들을 보면

결단코 진심으로 하신 말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지나

나는 교실로 선생님은 퇴근하시러갔다. 앞전에서도 적었지만 내가 같이 청소해야 할 날이었지만

교생 선생님과 함께 있을 것을 알고 있을 정도로 일상화가 되어서 아이들도

크게 내게 무어라 하지는 않았고 조용히 지나갔다.

 

또 하나의 사건은 수업시간이다. 그 선생님은 K 대학교 수학 교육과 출신으로 수업도 수학이었다.

지금도 수학은 잘 못한다. 그때도 그랬다. 그날도 여느 수업 날처럼 선생님이 칠판에 문제들을 적고

학생이 나가서 푸는 방식이었다. 그러던 중 내가 나가게 됐고 내가 일어서자마자 반 아이들 중 한명이

“쟤는 수학 문제를 전혀 풀 줄 몰라요.” 그 말이 나올 정도면 웬만큼 대다수의 아이들도 다 알고 있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주위가 웅성 웅성대기 시작하면서 “그냥 앉게 해요.”, “야! 그냥 앉아 있어.”라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끝까지 교탁위로 올라오라고 하고 아이들은 그 말에 반대하듯

부정적인 말들과 그 소리가 함성이 되어가듯 높아져만 갔다.

 

심지어 머뭇거리면서도 교탁까지 갔고 한발을 교탁에 올려놓자마자 아이들은 한 마디로

“ 내 려 와 ! ”라는 말로 합창(?)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학생이고 더욱이 교실이었으니 망정이지

하나로 뭉쳐진 언어와 함성은 언뜻 타인이 들었다면 어디 ‘데모하러가기 전에 연습하나?’ 오해할 정도로

단합(?)이 잘 된 아이들이었고 한 마디였다. 교탁에 올려놓은 한발을 내렸다가 올렸다가 하다가 끝내는

문제가 적혀있는 앞까지 전진, 후진을 번갈아하며 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이들이 수업시간인데도

그 한마디 구호처럼 외치는 것을 그치지 않았고 선생님도 아이들의 그 소리를 그냥 두시고

나만을 보고 계셨다. 그때 나는……. 학생은 학생이었는지 아이들의 단합이 잘되면서도

부정적인 한마디 구호, 함성을 들으면서도 선생님이 나만을 보고 계시는 상황에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교탁까지 올라 온 용기(?)로 분필은 잡았지만 문제는 수학문제이고 분필을 잡은 나에게

아이들의 함성 구호는 구호를 넘어 발악에 가까운 소리였고 단어형의 구호를 외치는 몇 몇은 대화체(?)로

“야! 그냥 내려와 우리 반 망신시킬 일 있어?”, “그냥 내려와라. 좋은 말로 할 때…….” 등등의 말이 나왔다.

 

다른 반에서도 몇 몇이 우리 반 유리창을 너머로 무슨 일이 났는지 보러 올 정도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때는 분명 수업시간이었다.) 분필을 잡고 있는 상태에서

부정적인 말을 발악적으로 쏟아내는 아이들과 그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지 유리창 너머로 보고 있는

다른 반의 아이들을 보고 문제가 적힌 칠판을 교대로 보고 있으면서 더더욱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내 손(분필을 잡은 손)을 선생님은 덥석 잡고 답을 적어 내려가는 것이었다.

 계속적으로 아이들의 발악적이면서도 구호인 부정적 말들은 그칠 줄 몰랐지만 답을 적어 내려가는 것이

거의 끝에 다다라가면서 아이들의 소리도 점차 줄어들었고 답을 다 쓰시고

(분필은 내가 잡고 있었지만 문제의 답은 선생님이 적으셨기 때문이었다.) 난 후

분필을 놓을 땐 그 소리도, 그 누구도 한마디도 안하고 조용했다.

예전 내가 1학년 때 교생 실습하러 나온 선생님은 과목이 수학은 아니었지만

그 무슨 일이었든지 앞에 나가서 하기를 쑥스럽고 창피해 했던…….

그리고 그 곳까지 가까이 가면 갈수록 두려워했던 내게 그때(1학년 때도)도

한 아이의 말로 인해 한바탕 웃고 지나갔다. 하지만 난 창피한 나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에겐 해프닝…….

웃고 넘길 일이지만 누군가에겐 아픔, 슬픔이 된다는 게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바탕 웃고 나서(?) 다시 자리에 않았다. 그러나 이 선생님은 달랐다.

아이들이 집단으로 떠들썩거려서 조용히 시키고자 주의를 주거나 그냥 넘어가지 않고 끝까지 하게 하셨다.

그 수업시간이 끝난 후에도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내게 그 어떤 말을 하는 아이도 없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지금도 수학은 잘 못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교생 실습이 끝나셨다.

앞전에도 적었는지 모르지만 교생 실습이 끝나기까지 선생님과 나와의 점심시간은 지속 되었고

대화 또한…….앞에 적은 대로 선생님을 대하면서 마음의 벽이 허물어져 무방비 아닌 무방비 상태가 되어

조금씩 대화도 길어지고 단답형이 아닌 긴 답변을 해야 할 땐 길게, 짧게 답변을 해야 할 땐

짧게 그야말로 일반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교생 실습이 끝나 마지막 인사를 하시는 시간,

선생님은 우리 반 아이들에게 플라스틱 반 투명자 하나와 또 무슨 물건을 주셨는데 지금은 생각이 안 난다.

그 플라스틱 반 투명자에는 교생 성생님의 출신 대학교 마크와 이름이 있어서 그것은 기억하고 있다.

사람이란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그 일을 겪으니까

뭔가 아쉽고 무겁게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아마도 나의 유치원 생활부터 대학시절을 통틀어서 봐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느낀 감정이었다. 그 선생님이 가신 이후로 다른 때는 그 어떤 선생님에게

쓰지 않은 편지를 적기 시작했다. 다른 때는 의무감으로 쓴 편지(국군의 날 위문편지, 스승의 날

선생님께 쓰는 편지……. 등등)들을 많이 썼지만 그때 쓰는 편지는 자발적으로 쓰는 편지였고

의무감으로 쓴 때보다는 지금 생각해보면 뭔 말을 그리도 많이 적었는지

의무적으로 쓴 편지와는 질적(?), 양적으로 달랐다. 3분의 1일을 넘어 2~5장, 수업이 끝나 쉬는 시간,

등하교 길 가운데, 심지어 교회(예배 시간이 아닌 부서 모임 중)에서도…….

그런데 내가 써 보낸 편지와 편지지는 일반적인 흰 바탕의 줄이 있는 것이고

가장 기본적인 것인데도 답장으로 온(선생님이 쓰신 편지는) 알록달록한 것이나

그 당시 유행했던 만화 캐릭터 편지지였다. 뭐, 편지지야 무엇이든 간에 답장을 받는다는 것.

누군가도 나에게 편지를 썼다는 것에 대해 또 한 번 놀랐고 행복했다.

 

지금 그 답장을 받은 편지는 없지만 ‘추억’이란 이름으로 내 마음에 남아있고,

주고받은 편지에 대한 내용도 지금은 모르지만 ‘행복’이란 내용으로 내 마음에 남아있다.

 

지금 여기에 적은 일들은 수 많은 일들 중 고르고 골라서 적은 일들이다.

누군가는 나의 이 글을 보고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선생님이 잘해줬으니까

아직까지도 생각나는 것 아니겠느냐고, 이 글을 쓴 필자 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해줬을 텐데

오해하는 것 아니냐고- 난 대답한다(이게 진정 독자에 질문에 대답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앞에도 적었지만 사람은 누구나 한계가 있다. ‘도브 컴플렉스’를 아는가? 내가 하는 이 생각,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마음, 이 감정이 오해라면 이런 오해를 하기 훨씬 전에 포기하시 듯 나를 버리셔야 했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하셨다면 교생 실습이 끝나기까지 점심을 함께 한 일과

그 이외의 대화의 시간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나는 되묻고 싶다.

누군가를 위하는 척, 생각해 주는 척, 함께 있어 주는 척 가면을 쓰듯 변장하기는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 가면(변장) 또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벗어지게 되고 벗어야 한다.

자신의 변장하는 힘의 한계 때문에 지치기 때문이다. 힘의 한계가 오면 그 가면을 벗고

원래의 자신으로 되돌아가거나, 타인이 그것(가면(변장)을 착탈(着脫)하는 구나라고)을 눈치 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시인 유치환의 ‘행복’ 중에서-

 

※도브 컴플렉스 (Dover Complex) : 수컷에게 지나치게 헌신적인 암컷 비둘기가

자신의 사랑에 힘겨워 일찍 죽는다는 데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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